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평가 ==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며 사실상 ''''요동 정벌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요동 정복(요동 점거)은 커녕, 요동에 대한 무력 시위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홍건적]]의 침입때만 해도, 200,000명이나 되는 홍건적 대군에[* 《고려사》 기록에는 200,000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고려로 넘어온 홍건적들은 거의 망한 상태라 만만한 고려로 도망쳐온 것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대군을 끌고 왔다면 넘어오기도 전에 상당한 숫자가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나라의 군웅은 대부분 다 홍건적 출신으로 홍건적이 보급 문제를 우려해 속도전으로 수도 개경까지 접수했고, 고려군이 이들로부터 원나라 황제 옥새까지 회수했는데 그 상징성을 감안하면 이들을 마냥 도적떼로 볼 수만도 없으며 또한 이들은 홍건적 동계홍건군 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했던 중로군으로 고려에서 거의 전멸당했지만 이들 동계홍건군은 훗날 명나라 건국의 주체 세력이기도 했다. 명나라에서도 이 군대가 고려에서 대패당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이때 고려로 쳐들어온 군대에 주원수 즉 성은 '주씨'이고, '원수'라는 직책의 인물이 이후 전혀 기록이 없는데, 주원수가 명 태조 주원장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이때 주원장은 동계홍건군 강회군 소속으로 그럴 가능성은 낮다.] 국경이 털리고, 고려의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개성시|개경]]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었었다. 심지어 [[고려 말 왜구의 침입|바로 직전에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만 보아도 '''고려는 국가 멸망의 상황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컸었다.''' 당대의 이런 상황들을 보면 당시 고려의 국력에 대해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또한 당시 명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과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한 명장들이었고,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의 능력이나 전공을 감안하면 굴복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명사(역사책)|명사]]》를 보면 당시는, 만주족 같은 이민족들이 자기들도 뭔가 해보겠다고 사방에서 반란 일으키고 난리였던 명나라 말기와 비교해서 상황 자체는 딱히 훨씬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에 원정까지 가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인물들의 개인적인 능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사적 능력과 지식을 감안할 때 원나라가 이들의 세력을 상당히 격파하는 데 성공했었더라도 끝장을 내지 못했다면 한 고조 유방이나 모택동처럼 두고두고 후환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 점은 고려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성계의 주장에 따르면 위화도 회군 이전의 군대의 사기도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좀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다가는 [[관구검]]처럼 빅엿을 먹일 수도 있는 장군들을 상대로 보급 문제도 좋지 않은데 사기마저 떨어지는 군대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사기가 낮은 군인들은 [[용인전투]]나 [[북송]] 시절 북송군 2,000명이 금군 호위무사 17명에게 발린 사례[*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북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정사의 기록이다.]처럼 진짜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자주 보여주는데 만약 타지에서의 전쟁이 자기들 생각보다 힘들거나 자신에게 별 이익도 없는데 따르기 싫다는 생각이라도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을 것이다. 당시 명군은 '''중원 통일을 위해 원나라와 이민족들은 물론 같은 [[홍건적]] 즉 동계홍건군 출신 주원장과 서계홍건군 출신 [[진우량]]이 맞붙은 [[파양호 대전]] 같은 패권다툼을 벌이며 성장한 정예병들이었다.''' [[나관중]]이 지은 중국 고전의 명작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의 모티브[* 중국 학자들은 나관중이 실제 주원장 휘하 군인으로 파양호 대전에 참전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가 되기도 한 파양호 대전은 홍건적 출신 장수들이, 홍건적 출신 병사들로 서로 전쟁을 치뤘는데, 이들은 고려로 쳐들어온 홍건적과 같은 출신으로 고려를 침공했던 홍건적은 원나라 황제의 옥새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당장 명나라의 남옥마저도 북원군이 주둔한 [[후룬베이얼시|후룬베이얼]]에 150,000명의 병력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벌이며 원나라 황제 옥새를 손에 넣었다. 중원을 잃었을지언정 본거지에서 세력 자체는 가지고 있었던 북원의 명맥을 끊어놓지 않으면 명나라 입장에서는 원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할 수 없었으므로 후환의 싹을 마저 조지기 위해 주원장은 북원 정벌을 명했고, 그래서 명군이 대규모로 쳐들어가 북원을 조진 것이다. 즉 '''원나라 정규군과의 전쟁과 홍건군 내전을 겪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주민족의 정예병들이 초원 지대로 쳐들어가 유목민족의 대규모 기병을 복날 개 잡듯 두들겨팼단 소리다'''. 고려군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20만 대군을 막아내고,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의 침입]]도 막아냈지만 어디까지나 '막아냈다'일 뿐이고 그나마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고려군이 이렇게 전투 경험을 쌓는 동안 명군도 상술했듯 고려군 전 병력의 몇 배에 달하는 대병력이 공격과 방어 모든 부분에 걸쳐 전투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규모 회전이나 화력전 등의 경험에서 '''고려군은 명군보다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고려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마련한 40,000명의 공요군이 명나라를 침공했다가 요동 벌판에서 모두 산화해버린다면 고려의 국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멸망|지구상에 고려가 남아있을지 자체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약 20년 후 베이징에서 2,000km 넘게 떨어져 있는 [[호 왕조]] 베트남이 [[교지(명)|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이성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주로 이성계의 <사불가론>을 비판하는 것인데, 우선 앞서 말한 소국이 대국을 친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을 받았다. 즉, 유교적인 논리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안된다는 게 얼마나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냐는 것이다. 이 언급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공 여부 이전에 성공할 수 있는 미미한 가능성 조차 절대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에서 벌어진 그라니쿠스 전투로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가볍게 정복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완전 정복이라는 대업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쉬운 일임에도, 만약 이성계의 <사불가론>이 유교식 논리라면 이것마저 시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돼버린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만 가지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나라와 모든 백성들의 운명을 걸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다. 무엇보다 이성계의 주장은 유교식 논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반대'''였을 뿐이었다. 즉, '''약한 나라(약'소국')가 강한 나라(강'대국')를 먼저 공격하면 매우 위험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전근대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통용되는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당연한 주장이 된다. 더군다나 [[이성계]]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1차 요동정벌|실제로 요동을 공격해본 제1차 요동정벌의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발언을 이런 유교적 사대주의라고만 해석해서 매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41년 [[진주만 공습]] 이전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였다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본군 수뇌부가 무시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한 결과]]만 보아도 이성계의 반대는 지극히 합리적인 반대였을 뿐이었다. 한편, 당시 요동 지방은 명나라가 영유권을 주장만 하는 지역이었을 뿐 실제로는 기원후부터 약 1,000년간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 계열이 지배하고, 이후 약 500년간 거란과 금나라, 원나라 등의 북방 민족이 지배했던 땅이어서 한족 계열 중원 제국들은 당시 시점으로 명나라 이전에는 요동 지역을 역사상 차지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당시 난징을 수도로 하고, 베이징은 북방으로 후퇴한 원나라를 견제하는 변방 거점 요새 정도로 치던 명나라가 고려의 제2차 요동정벌 이후 고려의 요동 점유를 계속 인정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당대 태조 주원장과 명나라의 성향을 오판한 해석으로 명나라는 엄청난 대군으로 당시 요동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던 원나라 출신 군벌 [[나하추]]를 결국 굴복시킨 뒤에 요동에 대한 점유를 확고히 하던 상황이었다.[* [[명나라]]의 [[홍무제|태조 주원장]]은 1387년 정로대장군 풍승(馮勝)[* 송국공(宋國公) 풍승. 명(明)왕조 1등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6명의 공작(公爵)들 중 한 명이었다. 주원장은 태자가 급사하자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풍승이 위협이 된다고 느꼈는지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다.]의 지휘 아래 좌부장군 부우덕,[* 남옥과 함께 주원장이 총애하던 장수였으며, 며느리가 주원장이 가장 아끼던 딸 수춘(壽春)공주였다. 남옥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필과 함께 출로를 모색했다는 고변이 주원장에게 들어갔다. 어느 날 주원장이 부우덕에게 그의 두 아들을 데려오라 했으니, 누군가 이르기를 이는 두 아들을 죽여서 데려오라는 뜻이라고 했다. 부우덕은 피가 떨어지는 두 아들의 목을 가지고 주원장에게 갔다. 그리고 주원장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자결했다.] 우부장군 남옥[* 주원장은 남옥을 일컬어 "나의 중경(仲卿)이며, 약사(藥師)다"고 할만큼 주원장이 아끼던 명장이었다. 중경(仲卿)은 전한 무제때의 명장 위청, 약사(藥師)는 당나라 태종때의 명장 이정을 말한다. 1388년 남옥은 총사령관으로서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원 정벌에 나섰다. 부이르 호수에서 북원 군대를 대파하고, 마침내 쿠빌라이계 북원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훗날 주원장에게 처형당했는데, '남옥지옥'(藍玉之獄)으로 불리는 이 대옥사로 인해 남옥과 연루되어 처형당한 자가 무려 20,000명이었다.]의 20만 대군을 요동으로 출병시켜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을 점령하도록 했다. 결국 이런 명나라의 대군세를 바탕으로 한 주원장의 항복 권유에 나하추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명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결국 경계심이 많고 괴팍한 성격의 의심병 환자였던 주원장의 명나라가 정말로 자신들이 피흘려서 어렵게 점유한 요동을 무력으로 공격한 고려에게 관대하게 허허 웃으면서 전쟁없이 그대로 묵인하고, 고려의 요동 점령을 봐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것 외에도 이성계가 마련한 타협안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성계의 말대로 가을에 진군시 군량 수급에는 문제가 없겠으나, 이후 찾아올 요동의 혹독한 겨울을 과연 버텼을까라는 것이 의문점이다. 물론, 그냥 경고성 공격으로 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지만 문제는 의심병 환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경계심이 많았던 주원장의 명나라가 그러한 경고성 공격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 줄지가 문제이다. 어쨌든 이 타협안마저 안된다면 그냥 요동정벌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도 이성계의 처음 주장은 요동정벌이 불가하다는 것이었으나, 우왕과 최영의 결심을 꺾을길이 없자 어쩔수 없이 차선책이라도 낸것이니, 차선책이 완벽할리 없는게 당연하다. 완벽하다면 최선책이 되지 차선책이 될 이유가 없으니. 일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세의 승리에는 다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주변 환경이 유리하게 돌아가거나, 지도자가 천재적인 지휘관이라던가, 이것도 아니면 휘하 병사의 정예 수준이 남다른 유리함 정도는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처럼 통일 왕조인 당나라가 마음 먹고 대규모 원정을 진행했는데 수성도 아니고 야전에서 수차례 막힌 적이 있다. 상대는 당시 그렇게까지 강하다고 보긴 애매했던 토번이었다. 이때 토번이 전성기 당군을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휘관인 [[가르친링]]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르친링이 지휘하지 않는 토번군은 당군과 맞붙을 때마다 연전연패했다. 훗날 토번군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지만 이건 당나라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이라... 여하튼 가르친링은 토번의 장수는 물론이고, 동맹군인 돌궐마저 패배할 때 혼자서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해 버렸다. 토번의 주력군과 동맹군이 모두 패배한 직후에 소라한산 전투라는 걸출한 위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가르친링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칭기즈 칸]] 테무진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본인도 뛰어난 마당에 휘하에 제베, 무칼리를 포함해 뛰어난 무장들과 아들들이 있었고, 뛰어난 기마병들이며 칭기즈 칸의 명령하나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실제 금나라와의 전투 당시 불길속에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100,000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인 금나라, 서하, 호라즘 등은 실패한 국정으로 국력이 약화되거나, 몽골군을 막기엔 빈약한 지휘관들의 문제, 내분으로 인해 알아서 자동문 수준으로 무너졌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고, 칭기즈 칸 사후에 벌어졌던 헝가리 원정은 1차 때도 매우 고전했지만 나중에 노가이가 110,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침공했을 때는 중장기병을 앞세운 30,000명으로 가볍게 몽골군을 짓밟으며 승리했다. 위에서 대국 침공 운운의 반박 사례라고 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례도 그야말로 '''천만다행으로 엄청나게 운이 좋게''' 전장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아 승리했으니 망정이지 지도자로서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무모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소스 전투]] 이전까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정복은 그냥 [[맨땅에 헤딩]]한 게 아니라 [[그라니코스 전투]]에서의 한타 싸움에 승리한 이후 이 지역의 친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그라니코스 전투의 승리 역시 애초에 페르시아군의 전력이 마케도니아에 비해 열세인 상황에서 마케도니아와 동포 의식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그리스인 용병대의 활용을 주저한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반대로 고려는 이미 제1차 요동원정에서 이원경 같이 회유 가능한 고려계 유민들은 다 끌어모았고, 제2차 요동원정 시기가 되면 딱히 기대할만한 친고려 세력이랄 것도 없었으며, [[이소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결정적 국면마다 오판으로 결전을 말아먹은 [[다리우스 3세]]와 달리 명군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명성을 떨친 명장들이 즐비했다. 군사력면에서도 마케도니아군은 [[헤타이로이]]로 대표되는 강력한 장창 중기병과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전력을 보유하여, 숫자만 많지 절반 이상이 농민 징집병인 페르시아군에 대해 군사력의 비대칭을 유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요동전에서는 오히려 고려가 농민 징집병으로 숫자만 간신히 채운 전형적인 약군으로 명군의 기병대에 짓밟힐 걱정부터 해야 했다. 직접 비교할만한 사례인 [[팔기군|후금군]]이 [[명나라군|명군]]을 상대로 요동을 방어한 [[사르후 전투]]와도 비교하자면, 여진족들은 그곳에서 살아오던 민족인 만큼 요동의 지리를 손바닥 안에서 꿰고 있었으며,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기마 민족의 군대인 만큼 기동력도 고려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탓도 있고. 이성계는 분명 [[명장]]이지만,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출전한 전쟁은 위화도 회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비록 이성계 본인의 명장으로서의 명성으로 고려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휘하 병력인 '공요군'부터가 그 숫자가 터무니 없이 적었다.''' 비록 [[가별초]]로 대표되는 정예 사병집단을 거느렸다고는 하나 그 규모는 많아봐야 3,000명 정도로 40,000명의 공요군 내에서 채 1할도 차지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명나라와 싸워야 하는 공요군 전체의 숫자가 겨우 40,000명에 불과했다.''' 가령 당나라와 전쟁을 한 [[가르친링]]의 대비천 전투의 사례를 보면 이때 가르친링이 당군을 격파할 때 동원한 군세가 무려 400,000명에 달했다. 이에 비하면 공요군은 상당히 적은 병력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주원장 휘하의 장수들 역시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군사적인 부문에 욕심이 많았던 주원장이 이성계를 사돈감으로 생각할만큼 이성계가 뛰어났긴 했지만 이들이 이성계에 비해 모자란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욱이 주원장의 장수들은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전장에서 군공을 쌓았고, 대부분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병력들을 다뤄본 적이 있기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도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주원장과 생사를 함께 하던 휘하 장수들이 대부분 주원장과 같은 홍건적[* 홍건적으로도 불리지만 홍건군으로도 불린다. 도적떼로 폄하돼서 그렇지 엄연히 명나라를 건국한 세력이자 주원장의 친위세력으로서 주원장과 함께 생사를 넘나든 장수들은 대부분 이들이었다.] 출신으로 '''홍건적 20만 대군에 맞서던 고려군 선봉장 이성계의 무공도 인상적이고 높이 살만하나 전쟁은 이성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고려 병력은 잘 훈련된 정예병이긴 했지만 수가 40,000명에 불과했다. [[홍건적의 난]] 당시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간신히 고려군 숫자 200,000명을 채웠지만, 이 수는 말 그대로 고려에서 유생들에 노비들까지 움직일 수 있는 남성들은 다 징집하여 구성한 병력들이었다. 당시 만 26세의 이성계가 [[가별초]]를 이끌고 선봉장으로서 전공을 세웠으나 총지휘관은 [[정세운(고려)|정세운]]이었다.[* 사실 고려 말기에 진짜 능력있는 인재진들이 가장 많았을 때가 제31대 [[공민왕]] 때였다. 정세운, 이방실, 안우 등을 비롯해 최영, 이성계가 있었고, 이인임마저 이때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신으로 타락하기 이전이라 인재진들의 다양함과 수는 우왕 때보다 단연 많았다. 물론 그런 공민왕 시기에도 이 인재들 전부가 고려에 입적하고 있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유는 내란과 모략 때문... 결론을 말하자면 요동 정벌을 속행했을 당시 고려는 물량, 시기만이 아니라 인재진들마저도 많이 감소했을 때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문관쪽은 아직 많이 남아있긴 했다. '''정몽주'''를 위시한, 공민왕 시기부터 일하고 있었던 이숭인, 권근, 이색, 이첨,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아직까진 협력중인 신진사대부들이 있었고 이후 성장하며 두각을 드러내는 '''하륜''', 우현보 등 사대부 출신 권문세가들에 무엇보다 아직은 하급 관료이지만 훗날 조선의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있었다. 정몽주와 이색 등 조선에 반대한 문신들의 당대 위치나 능력, 정도전, 하륜 등 훗날 조선에 협력한 문신들의 능력, 태종의 정치 능력을 고려해 봤을 때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한 협상이 주가 되는 게 결과론적으로 고려에도, 최영과 우왕에게도 이로웠다.]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하다는 이성계의 주장도 객관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농번기에 수 많은 장정들을 군대로 끌고 갈 경우, 당연하지만 안 그래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으로 초토화된 고려 내부의 식량 사정이 더 악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후 또한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시기였다. 여름에는 온갖 질병과 함께 음식도 쉽게 상하며, 습할 경우 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특히 장거리 원정 공격이면 보급이 중요한데 병졸들과 군량이 장마철에 비를 맞으면서 오랫동안 행군하면 질병이 크게 돌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당시 요동은 무주공산도 아니었고[*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였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제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000 - 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나라는 150,000명의 군사력과 최소 400,000명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어찌저찌해서 요동을 결국 점령해서 버틴다고 해도 계속 버틸려면 겨울 동안 보급이 꾸준히 바쳐줘야 하는데 당대 고려가 그러한 보급을 위생적이고 안정적으로 계속 감당해줄 수 있을지 부터가 지극히 의문인 상황이었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에도 요동성은 막상 이성계가 직접 함락시켰지만 군량미가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물러났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이미 요동성을 함락시켰던 경험이 있는 이성계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요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보는 편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이러한 수성의 어려움과 당대 태조 주원장과 명군의 성향을 생각해봤을때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고도 주원장의 분노를 사지않고 명군과의 지루한 싸움에서 마지막까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처음부터 굉장히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명나라는 팽창정책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참 전에 [[파양호 전투]]로 한족(홍건적)의 서열 정리를 끝내어 내환의 요소는 상당 부분 사라진 상황이었다. 위화도 회군 시점에선 숙적 북원 또한 상당히 박살난 상태였고, 명나라는 주변 정리를 얼추 끝낸 뒤라 요동성 쪽으로 군사력 집중이 충분히 가능했고, 더해서 강남과 화북의 어마어마한 생산력까지 함께 움켜쥐고 있었다.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조차 중국을 상대할 때 화북과 강남이 각기 다른 왕조(금과 남송)로 나뉘어 있었던 행운이 뒤를 받쳐줬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당시 남송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몽골에게 손을 내밀어 몽골과 연합했고, 이 때문에 금나라는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온전하게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금을 멸망시킨 후 몽골은 남송으로 말머리를 돌렸고, 수십 년간 전력을 다해 공격해서야 남송까지 멸망시킬 수 있었다.] 다만 원나라를 계승한 북원은 멸망시켰지만, 칸국들이 건재해서 계속 명나라를 괴롭혔다. 심지어 고려가 가진 병력의 질이 좋았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군사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고려는 사실상 국왕의 권위에 의존한 토호들의 사병들이 정규군 역할을 하면서 군대를 꾸렸다. 고려군은 앞서 예시로 든 가르친링의 토번군과 비교해도 상태가 더 안 좋았다는 것이다. 토번군의 경우, 그저 당나라군이 더 강했을 뿐이지만 고려군은 이성계가 회군 직전에 군량이 부족하여 진군하기 어려우니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최영은 요동을 점령하면 군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막연하게 대답했다. 또 당시 고려를 침공한 홍건적 일파는 한반도로 도주한 세력이었다. 다만 이 홍건적 일파가 동계홍건군 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중로군이었고, 이들 동계홍건군은 훗날 명나라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된다. 그리고 왜구가 대규모 공세를 펼치고, 다량의 전함을 운용했다고 하지만 [[세키부네|중세 일본 함선]]의 특성상 많아봐야 수만 명이며, 최대로 잡아도 20,000명 ~ 30,000명 내외의 침공이다. 이것조차 제대로 못 막아내서 개경이 함락되고 남해안이 쑥대밭이 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이런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은 전쟁, 특히 중세 시대 전쟁의 경우 일반적으로 방어자가 유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려군의 전투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강하다던 명나라도 사실상 왜구와의 전쟁 상태였다. 고려 말기 진포해전으로 시작해서 황산대첩으로 마무리하며 왜구의 주력은 밀어냈으나 명나라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주원장은 최측근인 탕화까지 보내서 대비책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고, 명나라 전기 내내 왜구들에게 털렸다. 명나라는 재정상태가 좋은 강남 지방이 왜구들에게 계속 털리면서 국고에 부담이 갔고, 중국 동남 해안은 사실상 통제불능 상태였다. '''영락제 시절 명나라가 왜구를 대파했다며 자랑스럽게 기록했을 때, 왜선이 31척이었고, 왜구들 수는 2,000명이었다.''' 왜선 500여 척을 침몰시키고, 그 500여 척에서 육지로 상륙한 왜구들과 내륙에 있던 왜구들까지 합한 왜구들을 몰살시킨 진포해전과 황산대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은 16세기 [[임진왜란]]때까지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을 겪지 않은 반면, 명나라는 훗날 단지 53명에 불과한 왜구들이 국토를 휘젓고 다니면서 제2수도인 남경까지 공격하여 4,000~5,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런 영향인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조선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자 조선은 강군(强軍)을 보유하고 있는데, 왜 그런 요청을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만약 북원을 치러 간 명나라의 15만 병력이 북원을 부순 후에 고려의 공격을 그냥 경고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 침략 시도로 판단하여 고려로 전면 진공했다면 이를 고려가 막는다는건 객관적으로 봤을때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설사 경고성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명나라 입장에서는 내부 불만분자들을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겸 해서 고려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다. 물론 주원장 본인은 명이 건국되자 내부 정리와 반란 세력 소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쟁할 수도 있다.'는 겁만 주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 또한 가능성이자 고려의 희망사항일 뿐 실제로 주원장이 어떤 결정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주원장 이후 황제가 되는 [[영락제]]는 [[주원장]]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전적인 성향이었으므로 주원장 이후에도 고려가 명과의 충돌을 계속 피할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https://pgr21.com/recommend/2527|무엇보다 요동정벌 이후 상대해야할 명나라의 군사력이 고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 어마무시한 수준이었다.]] 현지인들의 민심이 고려쪽으로 확실히 돌아서려면 명군을 몇 차례는 격파해야 했을 테고, 50,000명에 불과한 고려군으로 그 몇 배가 넘는 명나라 정예군과 야전에서 정면 대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결국 이성계는 정면 충돌을 피할 공산이 큰데 명군이 요동 수복이 아닌 전격전으로 치중할 경우 고려로 들이닥칠 것이고, 요동과는 별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명군이 한반도에 그대로 진주해서 주둔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에 원정까지 가서 대도시([[카라코룸]], [[상도]] 등)들을 잿더미로 만들고도 물자가 남아돌아 [[베트남]]과 [[티베트]]에도 교전을 거는 한편 고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가 하도 설쳐서]] [[홍건적]]에게도 개경을 포함한 중요 도시들이 함락될 정도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성계는 바로 보급부터 걱정할 정도로 물자가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명나라는 결국 만주 지방에 대한 공세[* 아마도 정사 기준으로는 고려가 요동을 공격한다면 맞서게 될 군대이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8]] 고려와 여진족의 대결을 보면 여진족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다. ]에도 성공해서 요동 주변 여진족들을 상당수 복속시키게 된다. 더구나 몽골 세력은 적어도 군사력면에서는 고려보다 약체로 단언하기 힘들었으며 외형적인 전력으로는 만주족이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할 때보다 강했던 적이 많다. 또 군사적인 중요성을 가진 고려군의 화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87185|참조링크]]. 다만 링크의 책의 저자가 일본인이고, 화기 전문가가 아니며 한국 폄하적이라는 것은 감안하고 보자. 동아시아 고화기 전문가이자 로켓 공학 박사 채연석이 참여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6491|문화 콘텐츠 닷컴 글]]에는 이미 세종 때 중국 화기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역시 이 때까지는 압도적으로 우수하다고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당시 명군과 교전했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때 병종에 있어서 특별히 고려군만의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외 상대적인 비교를 하기 위해 무장의 질이나 병력의 규모, 보급 능력 등을 살펴봐도 딱히 고려군만의 우월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려는 홍건적 잔당한테도 수도가 털릴 정도였고 이성계도 적과 아군의 무장과 보급을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무식하게만 싸운 것은 결코 아니다.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의 효종도 금군을 가지고 군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다 상태가 개막장이니까 북벌을 포기한 것처럼 이성계도 행군을 하다 군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군이 아주 형편 없었으면 승리 가능성도 있겠지만 당시 명군은 그야말로 승천하는 기세를 가진 군대였다. 정주민족의 군대가 초원지대로 원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보자 ][* 이성계는 시기가 좋지 않아 활이 풀린다고 했는데, 이는 훗날 조선 후기의 박제가도 지적한 것으로 중국의 활은 사정거리는 짧으나 상시 사용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의 활은 그렇지 못하다고 단점을 지적했었다.] 참고로 명군과 교전한 몽골의 북원과 베트남의 호 왕조 등은 패배했고 엄청난 피해[* 몽골은 베이얼 호 전투에서 져서 수만 명을 잃고, 그 결과 [[카라코룸]]이 파괴당하게 되며, 베트남은 학살과 수탈을 당하다 명군의 1.5군 혹은 2군급 인물들에게 [[응우옌 짜이|최고 지략가]]나 [[레러이|영웅]]이라는 사람들이 고전 끝에 간신히 독립했다. ]를 입었으며 넘치는 보급으로 화포를 사용해 도시를 초토화시키던 당시 명군을 생각하면 고려, 조선도 이기든 지든 많은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성계 역시 명장이니 매우 잘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명군을 공격한 대표적인 명장인 누르하치 역시 명군의 무장 상태들을 고려하여 명군이 약체화되어가고 있을 때 움직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명장이라고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좋은 관리가 부임하여 명군의 무장과 보급이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 같으면 황제의 삽질로 해고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명나라와 긴장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와 이방원 역시 간간이 정탐을 해서 나온 결론이다. 물론 구체적인 방안으로 명나라와 긴장 상태가 높아지던 국가들에 명군의 병력 대부분이 묶이는 순간을 노리면 어떻게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교통과 통신 수준으로는 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며 설사 잡을 수 있었어도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상황이 이미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구체적으로 볼 때 명나라가 고려의 요동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몽골•여진 정책을 고려와 명나라 양국이 어떻게 수립하는지, 그 외에 명나라가 서방이나 남방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얼마나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여길지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적인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국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원, 베트남, 티베트 등과 적대하면서도 요동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보내기까지 한 마당에 명군과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고려가 요동을 공격해 점령한다면 명나라의 주적에 바로 고려가 포함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https://www.youtube.com/watch?v=dp0tqdu7fH4&t=8m33s|팽창주의적 성향을 가진 명나라]]가 사방에 배치한 군사력을 고려에 모두 투사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고려의 사정은 명나라의 예상보다도 좋지 못했다. 고려가 [[여요전쟁]]이나 윤관의 여진 정벌 때처럼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더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여말선초의 막장을 겪은 고려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세는 50,000명 남짓이었다. 명 태조가 밑에 서술된 병력을 투입한다면, 고려가 비록 명군의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단기간에 어떻게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가면 되지 않나?"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보급도 좋지 않고, 거기에 고려 내부에도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명나라가 팽창주의를 천명해 사방에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려 역시 얼마 전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왜구가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시 고려, 조선 사람들도 최소한 군사적인 문제에서 그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 또 중국사나 일본사를 보면 일본의 세력 역시 상인들을 통한 정보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주력군이 명군과 교전하느라 묶이는 신세가 된다면, 왜구의 횡포가 더욱 심해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은 많은 사람들이 요동 정벌의 실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였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000~6,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나라는 요동 지역에 150,000명의 군사력과 최소 400,000명이 넘는 인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과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5,000명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 정도만 해도 고려의 [[공요군]]과 맞먹는 수치이다. 그래도 쪽수는 비슷하니 공요군이 어찌어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한 숨 돌린 공요군에게 달려들 것은 북원을 치러 갔던 남옥의 대군 150,000명이었다. 물론 북원과의 전쟁에서 소모되었을 것이 자명하지만, 공요군 역시 요동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해야 한다. 설령 이것도 저 멀리 [[후룬베이얼시|후룬베이얼]]에서 달려 올 명군의 피로를 이용한[* 후룬베이얼에서 요동까지의 거리는 [[함경북도]] [[온성군]] 부터 [[전라남도]] [[목포시]] 까지의 직선거리 내외이다. 내연 기관도 없던 당시 15만 병력이 이동하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다.] 각개 격파라든지 어찌저찌 이겼다고 가정하자. 고려 5만 대 명나라 15만이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성계가 잡아먹은 병력은 북원을 멸망시킨 남옥의 15만 대군이다. 남옥의 15만 대군은 사실상 명나라의 최정예 주력군이다. 이런 강군이 박살난다는 것은 이성계가 이끄는 공요군이 '''북원군 이상으로 위험한 군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된다. 이러면 주원장이 적당히 물러날 리가 없으며 '''명나라와의 전면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고려는 5만 병력을 다 썼지만 명나라는 아직 동원할 군대가 남아 있다. 설령 '그래도 '경고성 공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 역시 후세에 퍼진 흔한 생각이지만, 한반도와 북방(원 잔존 세력)을 이어주고 중국의 중심지인 화북으로 이어지는 요동의 위치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소리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강역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요동은 [[거란]], [[여진족|여진]] 등 [[유목민족]]이 활약하던 지역이며, 주요 침략 루트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선 대대로 골칫거리인 지역이었다.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침공]]이야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도, 명군 중에서도 손꼽히는 [[문제(수)|수문제]]나 [[당나라]] [[태종(당)|태종]]마저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도 골칫거리를 미리 제거하자는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지도를 보면 요동 지역만은 수도에 버금가는 대도시 혹은 행정 구역을 만들어놓았다. 요나라도 발해를 정복한 이후, 이곳을 중요시했고 만주에서 중원으로 사실상 이주하다시피 한 금나라도 요동 지역을 실질적인 영토로 통치했으며 이후 청나라도 요동 지역만은 중요시했다. 이것만 봐도 요동의 중요성은 결코 귀찮으니까. 그냥 넘겨주자.라고 할 레벨이 '''절대로''' 아니다. 심지어 먼 훗날 [[일본제국]]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을 얻자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걸 원하지 않은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여 일본이 요동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또 대표적인 친원 국가로 알려지고 왕실에도 몽골 황실의 피가 흐르는 고려의 대외적 인상, 우왕 책봉 당시 보여준 북원과 고려의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북원이 막 몰락한 시점에서 벌어진 고려의 요동 공격을 주원장이 그냥 단순한 경고로 받아들일지는 엄청난 의문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주원장이 요동 공격을 '경고성 공격'으로 치부하고 적당히 물러나 주는 것이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주원장이 앞서 말한 여러 상황 때문에 '고려가 원나라 세력의 구심점이 되려는 것 아닌가? 계승권을 주장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후자로 판단될 경우 고려의 기선 제압을 위해 침공했을 가능성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여몽전쟁]] 급까지는 안 될지 몰라도 [[병자호란]] 수준은 충분히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문제였으며, 모든 것이 주원장과 명나라 수뇌부의 판단에 걸렸는데, 거기에 고려를 걸고 내기를 하기에는 판돈이 너무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